본문 바로가기

우아한 디자이너

04. 영국사람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가기



지난 면접의 상처가 아물어 갈 때 쯤, 남편의 이직과 함께 1년 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 조금 더 큰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큰 도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였는데, 신기하게도 참 조용하고 여유로운 그런 곳이였다. 설거지를 하려고 부엌에 들어가면 창문너머로 나무타기를 하는 다람쥐와 새들이 보이고, 넓은 호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였다. 복층집이였는데 그 집에서 남편과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순간은 이층에 있는 침대에 누워서 넓은 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날씨가 악명이 높아서 지레 걱정을 하곤 하는데, 나 역시 영국살이 첫 해에는 날씨에 대한 불만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살면서 느끼는 영국날씨는 변덕스럽긴 해도 참 사랑스러운 날씨라는 것이다.  비바람이 잦기는 하지만 덕분에 푸른 초원과 우거진 숲이 있고, 비바람이 불어도 금새 그치기 때문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에는 잠시 실내에서 티 한잔을 하며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그만이다. 


어쨋든, 영국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 사그러질 때 쯤 살게 된, 이 평화로운 작은동네는 나로 하여금 영국에 대한 또 다른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늘 그렇듯, 겁많고 소심한 나를 남편은 살살 꾀어서 한 걸음 세상밖으로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곰: 여보, 이 동네 너무 좋다. 그치? 

나: 응! 조용한데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많고 너무좋아. 

곰: 맞아. 동네사람들도 다 친절하더라. 나이드신 분들이 많아서 그런가?

나: 그래? 나이드신 분이 많아? 하긴 십대들을 많이 못 본것 같아. 

곰: 응, 요기 밑에 노인정이 있는거 같더라구. 거기서 봉사활동 할 사람을 구하는거 같던데.

나: 그렇구낭~ 

곰: 여보도 한번 해보는게 어때? 

나: 봉사활동? 흠.... (좀 부담스러운데....) 

곰: 매일가는게 부담되면 일주일에 한 번 만 해도 돼. 여보가 하고싶은 만큼 하는거야. 하기싫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돼. 




내가 하고싶은 만큼, 일주일에 한 번,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 는 남편의 말에 이번에도 반쯤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 일주일에 한번, 한 두 시간 만 해볼까...? 집에 매일 혼자 있으면 뭐해...


그렇게 나는 다음 날 남편이 이야기한 동네 노인정으로 향했다. 




나: 안녕하세요. 봉사활동을 하고싶어서 왔는데요...

테리: 어서와요. 고마워요. 이 쪽으로 잠깐 와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이 동네에 살고있나요? 봉사활동 경험은 있나요? 

나: 네. 바로 뒤에 살고있어요. 봉사활동은 영국에서는 처음이예요. 

테리: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럼 이 문서 읽어보고 적을 수 있는만큼만 적어줄래요? 





봉사활동이라고 해서 그냥 가서 시작하면 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나의 신원확인을 위해 작성해야 할 것 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질문에 유창하게 대답을 못하더라도 테리는 웃으면서 나를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테리: 이 곳에는 주로 노인분들이 오셔서 오전시간을 보내고 가세요. 아침마다 봉사자가 노인분들을 데리러 가기도 하고, 자녀들이 모시고 오기도 하죠. 

나: 저는 운전은 못하는데... 제가 도울 일은 어떤게 있을까요? 

테리: 우아한 디자이너님은 처음이니까 젤 재밌는걸 부탁할게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티랑 쿠키를 나눠주고, 식사시간에 노인분들을 테이블까지 안내 해주세요. 안부도 묻고 이야기도 들어주면 더 좋아하실거예요.  

나: 그걸로도 충분할까요? 

테리: 그럼요. 같이 놀면 돼요 ㅎㅎ



테리: 여러분~~ 여기 새로운 레이디가 왔어요. 이름은 우아한 디자이너라고 하고, 앞으로 매주 수요일날 여러분들에게 맛있는 쿠키도 나눠주고, 함께 게임도 할거예요. 많이 반겨주세요. 


할머니 할부지: 웰컴 반갑구나~~

나: 감사합니다. 이 동네에 살고있는 우아한 디자이너 예요. 영어가 서툴고 부족하겠지만 재밌게 지내요!

테리: 마침 곧 간식시간이니 쿠키와 티 나눠주는 걸 도와줄래요? 




쇼파와 의자에는 열 대여섯 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앉아서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셨는데, 언뜻 보기에도 일흔은 훨씬 넘어보였다. 연세가 있으셔서 행동이 느리고 힘이 조금 없으실 뿐 말씀도 잘하시고 건강하셨다. 심지어 몇몇 분은 스키니진을 입거나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도 계셨고 조끼에 신사모를 쓰신 멋쟁이 할아버지도 계셨다. 


쿠키 트레이가 들어 올때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두 눈이 초롱초롱해 지셨는데,  트레이 한 가득 올려져있는 쿠키들은.. 알게모르게 촌스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양갱이나 모나카, 종합캔디셋트나 김과자 같은 느낌이 폴폴나는 그런 옛날과자들 이였다. 


다른 봉사자 분께 쿠키종류를 물어보니 커스터드크림 쿠키, 생강과자 같은 것들이고 한 분 한 분 취향이 뚜렷하기 때문에 아무 쿠키나 드리면면 절대(?) 안되는 꽤나 중요한 임무라는고 하셨다ㅎ  특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티 만드는 것' 이였다. 차 문화가 발달한 영국답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하루에도 몇 잔씩 티를 마시곤 한다. 그리고 티 만드는 것에도 각자의 취향이 있기 때문에 나처럼 그냥 뜨거운 물에 티백하나 무심하게 툭 넣어서 주면, 적잖게 당황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국인들이 주로 마시는 티는 'English breakfast tea' 인데 티백을 얼마동안 우려내는지, 우려낸 티에 우유를 얼마만큼 넣는지, 우우를 먼저 붓고 티백을 우려내는지, 뜨거운물을 먼저 붓는지, 설탕은 얼마나 넣는지에 따라 취향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할머니 1: 얘야~~ 나는 초콜렛 쿠키를 주렴.. 음.. 티는 진하게 말고 우유를 많이 넣고 설탕 두 스푼 넣어서 주고. 

할부지 1: 나는 생강과자로 할게. 고맙다. 그리고 나는 티에 우유를 조금만 넣어줘. 난 강한 맛을 좋아하거든. 설탕은 됐다. 

할머니 2: 나는 커피에 우유를 적당히 넣고 설탕 한개 넣어주렴. 과자는 크림과자. 



맙.소.사 ....  완전 패닉이였다. 뜨거운 물에 그날그날 기분에따라 아무 티백이나 넣어서 하루종일 몇 잔이고 우려내서 마시는 외국인의 귀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요청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복잡하게 들렸다. 



얼마나 진해야 '강한 맛' 인거지? 우유를 많이 넣는 건 얼만큼 넣는거지?? 얼마나 우려내고 티백을 건져야 하는 걸까..?  




할머니 3: 아이고~ 얘야. 이건 너무 연해서 도저히 못 마시겠구나. 새로 하나 만들어 줄 수 있니? 아무래도 좀 더 우려내고, 우유를 조금 덜 넣어야 할 것 같구나. 

할부지 2: 테리~~~ 새로온 숙녀가 아직 티를 잘 못 만드는거 같은데 내껀 네가 좀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난 맛있는 티가 마시고 싶거든 허허허...

할머니 1: 얘야~~ 이건 초콜렛 크림쿠키이고... 난 초콜렛 칩 쿠키를 달라고 했던 거였는데, 바꿔 줄수 있니? 

할부지 3: 아무래도 오늘 티는 내가 직접 만들어 마셔야겠구만 허허허...




내가 혼돈의 카오스 속에 있는 와중에도 다른 봉사자 분들은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 한분 한분의 취향까지 다 기억해서 별다른 요청이 없이도 척척 티와 커피를 만들어서 드리고 있었다. 



와.... 어떻게 다 기억하시는 걸까... 나도 기억하고 있어야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첫 날이지만 오히려 내가 방해만 하는 기분이 들어서, 방법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나: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우아한 디자이너라고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1: 나는 헬렌이라고 해. 반갑다. 이름이.. 뭐라고??

나: 우아한 디자이너 예요 ^-^ 할머니는 티를 좋아하시나요?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어떤 쿠키를 좋아하세요?

헬렌: 나는 우유를 많이넣은 연한 티를 좋아하고 초콜렛 쿠키를 좋아해. 




한 분 한 분 인사를 하며 취향을 묻고 종이에 적어가기 시작했다. 외모와 이름을 함께 기억할 자신은 없었지만 우선 이렇게라도 시작해봐야지. 



할부지1: 근데 레이디~~ 이름이 뭐라고?? 

나: 우아한 디자이너 예요 ^-^

할부지 1:  우아....응??? 미안하구나 내가 나이가 많아서 기억을 잘 못하는 구나..



아... 영국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한글로 된 내 이름이 기억하기 힘드실 수도 있겠구나.. 




받침도 있고 낯선 발음의 나의 한글이름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 그럼 '레지나' 라고 불러주세요 ^-^

할부지 1: 오호~~ 레지나!! 레지나 였구나! 



영국에서 살게 되었지만 늘 한글이름을 고수하던 내가, 처음으로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이라는 건.. 기억해주고 불러줘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 



할머니2: 레지나야~~ 나는 제인 이란다. 호호호

할부지 2: 레지나야~~ 나는 코너라고 한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영국에서 산지는 얼마 되었니? 




그제서야 할머니 할아버지는 다정히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이것저것 질문을 하시고 반겨주셨다. 동양인 숙녀가 어쩐일로 이 먼곳 까지 와서 작은동네 노인정에 온 걸까...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